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실리 자이체프 (문단 편집) == 생애 == 우랄 산맥 근처의 산골마을인 옐레니스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사슴 사냥으로 사격술을 연마했다. 전쟁 전에는 [[소련 해군]]에서 복무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소련 [[태평양]] [[함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 중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전방 부대인 [[흑해]] 함대로 자원하였고 [[해병대|해군보병대]] 저격수로 배치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내내 저격수로 싸웠으며 1943년 1월에 독일군의 [[박격포]] 포탄에 피격되어 부상을 입은 뒤에 잠시 눈이 멀었다가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전쟁영웅으로 크게 선전되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분투하는 소련군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시력을 살리기 위해 소련 정부는 당시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안과의사였던 필라토프 [[교수]]를 파견했다. 하지만 바실리가 입은 부상은 심각했고 필라토프 교수도 최선을 다해 치료했으나 예전처럼 시력이 돌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눈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시력이 나빠져 예전처럼 저격 일선에는 나가지 못하고 이후 저격수 교관 업무를 주로 맡았다. 그러나 종전 시까지 계속 소련 육군에 남아 있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역인 제62군이 개편된 제8근위군 소속으로 1945년 [[베를린 전투]]에도 참가하여 베를린 근방의 젤로 고지 전투에 참전하고 종전을 맞았다. 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해군에서 [[상사(계급)|상사]]까지 진급한 뒤 [[육군]] [[준사관]]이 되었다가 [[보병]][[대위]]까지 진급, 전후 그 공로로 계속 진급해 육군 [[대령]]까지 이르렀다. 그가 전쟁 중 기록한 공식 사살 횟수는 '''242'''구인데 이 전적을 올리기 위해 사용한 탄환의 수는 '''불과 243'''발이었다고 한다. '''딱 한 발'''이 빗나갔으니 명중률은 무려 '''99.588%'''. 그야말로 '''원샷 원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저격수이다. 그는 [[모신나강]]을 사용해서 저격을 했는데, 그의 총은 아직도 박물관에 보관중이며 전쟁 이후에는 전쟁 영웅으로 우대받으며 [[키이우]]에서 공장을 운영하다 1991년 12월 15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근데 그가 죽은 지 10일 뒤에 그가 전쟁에서 지켰던 [[소련]]이라는 나라는 [[소련 해체|사라졌다]]. 세간에선 이를 두고 '''조국과 함께 잠든 사나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다만 [[우크라이나]]는 [[8월 24일]]에 일찌감치 소련을 탈퇴했기 때문에 독립국 우크라이나에서 사망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살다가 우크라이나에서 죽은 셈.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그와 초인적인 저격대결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SS]][[대령]] 하인츠 토르발트(혹은 육군[[소령]] 에르빈 쾨니히)는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에르빈 쾨니히라는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곳이 소련의 선전매체가 아닌 바실리 자이체프의 회고록이라는 점, 서류 누락이 전쟁 중 빈번히 일어났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무조건적인 소련의 선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방의 냉전적 시각이라는 말도 있다. 실존 독일 최고 저격수는 육군 산악[[상병]]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리 자이체프와 독일 저격수 사이의 대결은 분명히 있었다.[* 실제로 저격수를 잡는데는 저격수가 투입되었기에 독일군 역시 자이체프를 위시한 소련군 저격수들을 잡기 위해 많은 저격수를 투입했다. 물론 자이체프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그 동안 여러 독일군 저격수들이 그의 킬카운트 중 일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